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왕조 시대의 궁궐은 조선왕조 시대에 지어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의 합성어로 천자나 제왕, 왕족들이 살던 규모가 큰 건물을 '궁'이라 했고, 그 '궁'의 출입문 좌우에 설치했던 망루를 '궐'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짧은 1박 2일의 서울 여행 중 덕수궁 관람기를 적어본다.
처음부터 궁궐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의 침략을 대략 700회 이상 받았다고 알려진다. 대한제국을 멸망의 길로 이끈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 이전에 발생한 일본의 침략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아마 임진왜란(1592년~1598년)일 것인데, 이 기간 동안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이 많이 훼손되었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사유지였던 월산대군의 저택과 인근의 집들을 개보수 하여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이라 칭함)로 사용했다고 한다. (본래는 개인의 사택이었으나 역모의 죄를 물어 재산을 몰수했고 이후 저택을 왕족에게 하사함)
왜란으로 손실된 창덕궁을 중건했으나 선조는 결과를 보지 못한 채 사망하고 광해군 대에 중건이 완료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창덕궁 중건 이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정릉동 행궁을 오갔는데 후에는 결국 정식 궁궐로 승격 시키고 '경운궁' 이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이후 광해군이 자신의 계모인 인목왕후(선조의 계비)의 가족, 친인척 등을 탄압하고 나중에는 왕후를 유폐하면서 서궁으로 칭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선포와 을사늑약, 그리고 덕수궁
임진왜란 후 경복궁과 창덕궁 등을 동시에 복구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경복궁은 복구를 하지 못했고 거의 조선말기까지 방치(그래서 당시에 '범'이 경복궁에 터를 잡고 지냈다고도 함. 범은 호랑이나 표범을 뜻하는 순 우리말로 이때 범은 호랑이 보다는 표범일 것이란 추측이 많다) 되다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다시 복구하여 사용했다. 그러다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고종의 왕후인 명성왕후가 일본에 의해 살해 되자(을미사변) 고종은 러시아 영사관으로 피신한다('아관파천'). 이후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꿔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했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이유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던 경복궁이 꺼려졌고, 당시 경운궁 주변에 외국의 공관들이 많아 일본이 섣불리 행동하기 곤란한 지리적 이점을 살리기 위함이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제국주의 열강(국제적인 영향력이나 세력이 강한 여러나라)들은 대한제국의 독립이나 외세에 의한 불평등 조약등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러시아와 일본이 일으킨 러일전쟁(1904년~1905년)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게 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강제로 체결하는데 이 을사늑약이 경운궁(덕수궁)의 근대식 건물인 중명전(원래 이름은 수옥헌, 황실 도서관 이었다고함)에서 이뤄진다. 이후 일본의 부당한 국권침탈에 계속 저항한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가 극비리에 보낸 초청장으로 1907년 7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어 일본의 부당행위를 고발하려 했으나 참석이 거부당하고 신문기자단 국제협회에서 발언 기회를 얻어 처지를 알렸다.
그러나 열강간에 평화유지가 목적인 국제 정세에서 대한제국의 호소에 공감하고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움직이는 나라는 없었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협박하여 순종에게 왕권을 양위하게 한다.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에 즉위 한 후 일본은 고종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순종에게 강제로 창덕궁으로 옮겨가게 했고 고종은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에 '덕수궁' 이라고 호칭을 바꾸게 된다. 덕수궁 호칭 변경에 대해서는 순종이 고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로 부여했다는 해석과 상왕이 머무는 궁을 흔히 '덕수궁' 이라고 불렀고 상왕의 사후에는 원래의 명칭으로 불렀다는 관습적인 측면의 해석도 있다.(이완용의 이복형제인 친일파 이윤용을 통해 물러난 임금에게 흔히 부여하는 덕수 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했다는 것)
덕수궁(당시엔 경운궁)에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 할 당시엔 한 나라의 궁궐이라 하기엔 규모가 너무 초라했기에 주변 땅과 건물을 흡수하며 규모를 확장(경복궁 건물 일부를 가져오기도 했다고) 했지만 큰 화재가 발생해 대부분이 전소되어 버렸다. 이후 일부를 재건했으나 일본과의 강제합방, 고종의 승하 후 식민지 시절동안 많이 훼손되어 현재는 부지의 규모나 건물의 규모 모두가 현저히 감소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을 거치는 동안 완전 소멸해버리지 않은게 감사하기도 하다. (6.25 당시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탈환한 미군이 덕수궁에 자리를 잡은 북한군을 폭격하려 했으나 당시 미군 장교가 궁궐을 파괴하는것이 부담되어 북한군이 덕수궁을 빠져나가 퇴각하는 길에 폭격을 했고 덕분에 덕수궁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민들과 관광객의 휴식처가 된 덕수궁
덕수궁의 입장료는 성인 기준 1천원으로 매우 저렴하다. 대한문 옆의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매해도 되고 그냥 대한문 안에 있는 입장료 결제기에 카드를 꽂고 바로 결제해도 입장할 수 있다. 대한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우측에 중화문이 있고 중화문을 통과하면 중화전이 있다. 중화전도 원래는 지붕이 2중으로 된 모습(외관만 2층으로 보이는) 이었지만 화재로 사라진 뒤 단층으로 복구했다고 한다. (아…그놈의 화재…) 예전에는 담장으로 구역을 구분하고 길을 만들었겠지만 현재는 사라진 담장과 건물이 많아 사방이 뚫려있다. (일제 때 공원화…) 공원처럼 산책하는 휴식 공간으로는 탁 트인 전망을 보여주지만 원래의 모습이 더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처음 궁궐을 가본것이 2000년 경복궁 이었고 24년만에 덕수궁을 방문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된 창덕궁을 다음 목표로 해보자면 언제쯤 가보게 될까...지방에 살고 여행을 즐겨하지 않는 나로서는 기약할 수 없는 일정이지만 시간이 된다면 창덕궁도 한 번 여유있게 둘러보고 싶다..(이런건 수도권 사람들이 부럽네...)
'시간 흘려보내기 > 돌아다니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위스 그랜드 호텔 방문기 (7) | 2024.10.30 |
---|---|
청송자연휴양림 후기(신축 숲속의 집 1호 느티나무) (1) | 2024.08.26 |
우일완구사 방문기 (0) | 2024.08.16 |
칠곡호국평과기념관(+한미식당) (2) | 2024.08.12 |
2024.03.31 대구 달성공원 (0) | 2024.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