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후 그해 12월 16일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적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치러졌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역사적인 선거가 치러진 것이다.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그 어느때 보다 뜨거웠지만 이 선거는 기대와는 다른 결과를 낳으며 대한민국의 정치 방향을 크게 틀어놓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지역주의 정치의 시작이 된 사건이기도 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
1987년 대선은 '3김 시대'의 대표 주자인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네 명의 대결로 진행되었다. 당시 대선 결과는
■ 노태우 : 민주정의당 - 여당, 득표율 36.64% → 당선
■ 김영삼 : 통일민주당, 득표율 28.03%
■ 김대중 : 평화민주당, 득표율 27.04%
■ 김종필 : 신민주공화당, 득표율 8.06%
으로 전두환의 뒤를 이은 기존 여당 노태우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야권 민주 진영의 양대 산맥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그 반사이익으로 비교적 낮은 득표율을 얻은 노태우가 당선된 것이다. 민주화를 외쳤던 많은 국민들에게 이는 너무나 쓴 결과였다.
여소야대 정국, 그리고 3당 합당 추진
1987년 12월 대선 후 1988년 치뤄진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며 여소야대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의석수 기준 민주정의당 > 평화민주당 > 통일민주당) 군사정권의 뒤를 이은 여당이라는 비판과 낮은 대선 득표율에 더해 야당이 힘을 합쳐 정부를 견제하고, 특히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과 5공화국 비리 청산 등 전두환 정권의 적폐를 파헤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자, 노태우 정부는 국정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민주정의당은 정치적 연대를 모색했고 1989년 부터 정계 개편론이 대두되며 온갖 시나리오가 물밑으로 돌고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이해관계의 합산 결과로 민주정의당(노태우),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이 전격적으로 합당하며 민주자유당이 탄생한 것이다. 흔히 3당 합당이라 불리는 이 사건 배경은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 민주정의당 : 여소야대 정국을 해소하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한 집권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함
■ 통일민주당 : 1987년 대선 패배 후 다음 대권을 노리던 김영삼 총재는 차기 대권 주자로서 입지를 강화하고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총재보다 우위를 점하고자 함. 실제로 야당 의석수에서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에 뒤짐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비유를 남김)
■ 신민주공화당 :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던 김종필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면서 내각제 개헌을 기대함
애초에 노태우 정권은 당시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총재에게 가장 먼저 합당을 제의 했으나 김대중 총재는 여소야대 국면에서 사익을 도모하기 위해 정치 윤리와 민주주의를 후퇴 시키는 일은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결국 평화민주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 총재의 이해관계가 결합하여 3당 합당이 이뤄졌고 양당 체제가 갖춰지게 된다. 이 합당은 민주화 운동 세력으로 부터 '야합'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정치적 불신을 심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이때부터 민주자유당(여당) 세력은 보수 대통합이란 명분으로 스스로를 보수라 칭하고, 평화민주당(야당) 세력을 진보라 부르는 프레임을 만든다. (정작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개혁적 보수/중도를 표방함)
지역주의 정치의 시작과 분열
1988년 총선 당시 4당은 아래와 같이 이미 지역 기반을 뚜렷이 하고 있었다.
■ 노태우 : 대구경북 및 충청 일부
■ 김영삼 : 부산경남
■ 김대중 : 호남
■ 김종필 : 충청
그런데 3당 합당으로 대구경북, 부산경남, 충청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거대 정당이 탄생했고 이로 인해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평화민주당만 야당으로 고립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이후 영남권 기반의 '보수 여당' vs 호남권 기반의 '진보 야당'이라는 프레임이 만들어 지며(전우용 교수의 말에 따르자면 군부정권 색깔을 지우기 위한 작업으로 민주자유당 세력이 만듬) 정책과 이념의 대결 보다는 지역 간 갈등 구도로 흐르기 시작했고 이후 선거는 지역구도에 따라 승부가 갈리는 안타까운 현실이 정착하게 된다.
민주주의와 지역주의, 그 엇갈린 출발
1987년 대선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이정표인 동시에 지역주의 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3당 합당은 권력욕과 정치적 현실주의가 만든 대연합이었고 민주화 세력의 분열과 좌절도 존재한다. 이후 대한민국의 선거 역사에는 이 지역주의 구도가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며 합리적 판단을 흐리게 하는지 많은 증거를 남기고 있다.
3당 합당을 한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득권 세력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철저히 지역주의를 이용해 왔고 아직도 그 영향력을 무시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오죽하면 '나라를 팔아먹어도 찍어준다'는 말을 뉴스 인터뷰에서 버젓히 할 정도이며 1980년 5월 이후 44년만에 발생한 윤석열 정부의 12.3 불법 비상계엄을 겪고도 그로인해 치러진 조기 대선에서 40%에 육박하는 국민이 내란을 동조했던 정당의 후보에게 표를 줄 정도니 말이다.
물론 이는 지역 감정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갈등 요인을 부풀리고 혐오를 조장하며 허위를 유포하는 어그러진 정치 집단의의 영향도 있겠으나, 지역주의에 기반해 유권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사익 추구 집단은 앞으로도 이를 사익을 위한 수단으로 끊임없이 사용 할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발전을 위해서 대한민국은 언제쯤이면 지역주의를 소멸 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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